아카데미


제 목 데이비드 하비, 앙리 르페브르 <공간의 생산> 후기
글쓴이 관리자
파일

작성일 2017-04-28 04:17:01



https://www.amazon.com/Production-Space-Henri-Lefebvre/dp/0631181776


앙리 르페브르의 권위 있는 <공간의 생산>의 출판(Donald Nocholson-Smith의 훌륭한 영어 번역)은 매우 축하할 일이다. 르페브르의 방대한 작업(서지 목록 참고) 대부분이 다른 외국어권과 비교하면 영어권에서는 아직 빛을 보지 못했고, 따라서 위대한 20세기 프랑스 지적 활동가 중 한 사람의 작업과 삶이 앵글로아메리카 독자들에게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르페브르는 1901년에 피레네의 아제트모Hagetmau(그가 오랫동안 연결되어 있었고 후에 그의 농촌과 농민 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 지역이 된 지방)에서 태어났다. 자서전에 따르면, 그의 어머니는 가톨릭에 열정적이었으며 열광적이기도 했다. 반면, 그의 아버지는 도시적으로 반종교적이었다. 이러한 대조를, 그는 생애 대부분에서 즐겼다. 그의 정치적 의식은 지적 의식과 마찬가지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경험으로 형성되었고, 이런 지적 변화의 대혼란이 <공간의 생산>에서 아래와 같이 언급되고 있다.

 

1910년 즈음 확실한 공간이 산산이 부서졌다. 바로 추상적 사고 속에서처럼, 의사소통을 위한 환경과 채널처럼, 일반적 상식의, 지식의, 사회적 실천의, 정치력의 장소, 지금까지 일상생활의 담론에 간직된 공간의 장소였다. 유클리드와 원근법의 공간은 다른 옛 도시, 역사, 부성父性, 음악의 조성, 전통적 도덕 등의 평범한 것들과 함께 기준계로서 사라졌다. 이것은 정말로 잔인한 순간이었다.

 

1920년대, 중요한 지적 흥분과 정치적 혼란의 시기에 르페브르는 소르본 대학에 다녔다. 거기서 그는 젊은 철학자소모임의 한 명이 되었는데, 이들은 시대착오적이고 정치와 무관한 그 시대의 기득권 철학으로 보이는 것(베르그송이 전형이었다)에 저항했다. 이들은 주로 급진적인 잡지 <철학>에 기고했는데, 스피노자, 헤겔, 니체의 사상뿐 아니라 하이데거와 마르크스(그의 저작집이 그때 처음으로 불어로 번역되고 있었다)의 철학적 작업과의 지적인 조우를 통해 철학적 시도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르페브르와 동료들은 철학을 고립되거나 전적으로 전문적인 활동으로 보기를 거부했다. 이들은 과학의 진전(예컨대, 상대성 이론)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의 질들, 르페브르가 그때와 여러 후기 작업에서 모두 ‘quotidien’이라고 불렀던 것과 씨름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프랑스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도록 한 모로코에서의 18개월 군복무 후 2년간 파리에서 택시 운전사(공간과 도시 생활의 특성에 대한 생각에 깊은 영향을 준 경험)로 생활비를 벌었는데, 이는 철학적 작업에서 상아탑의 구상이라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 주었다.

젊은 철학자는 즉각적으로 1920년대의 예술적이고 문화적인 아방가르드 운동에 매혹되었다. <철학Philosopies>(1924)의 첫 번째 글들 중 하나는 다다의 초상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으나 그에게 트리스탄 차라, 아방가르드 운동의 선두 인물 중 하나와 평생의 우정을 선사할 만큼 충분히 훌륭했다. 브레통과 아라공 같은 초현실주의자와의 만남은 그에게 평생 동안 흔적을 남겼고, 특히 1956년 공산당과의 결별 이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스펙터클의, 시와 예술적 실천들의 고무하는 힘에 대한 그의 믿음은 1960년대 혁명적 운동에 향한 르페브르의 태도와 활동적인 참여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많은 초현실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르페브르는 다른 젊은 철학자들과 함께 공산당을 옹호하는 위치로 점차 움직였고 결국 1928년에 가입했는데, 프리바(파리를 떠나 아르데슈로)에 처음으로 고등학교 교사라는 정규직을 얻기 전 해였다. 1932년 몽타르지로 갔는데 그곳은 수도권에 더 가깝다는 장점이 있었다. 그의 지지는 일반적으로 다음의 것에 근거했는데, 마르크스 초기 저작에 대한 신중한 연구와 변증법적역사적유물론적 방법(마르크스의 <자본>에 분명한 것처럼)의 중요성에 대해 커지는 공감, 독일과 (프랑스를 포함한) 다른 지역에서 파시즘의 성장에 의한 크게 강화된 강한 감정으로, 이런 집단적 저항과 국제적 조직은 좌파의 진보적 운동에 필수적이었다... 중략


목 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