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제 목 인문학4강-10월20일 푸코(하순애 교수)
글쓴이 연구지원실
파일

작성일 2010-10-20 00:00:00



경계를 넘나든 철학자 푸꼬(Miscel Foucault 1926-1984)의 삶과 사상


 


하 순 애


 


한 사람의 생애를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생의 엄청난 굴곡과 내밀한 사연을 감안하면, 한 사람의 생애를 말한다는 것은 기껏해야 그 삶[生]의 언저리[涯]를 띄엄띄엄 짚어낼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한 철학자의 생애를 말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의 삶이 그의 사상과 씨줄날줄로 얽혀 있는 한, 퍼즐풀이 하듯이 삶과 사상을 풀어내야 하는데, 철학자의 사상을 관통하며 읽어내기란 여간 만만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푸코라니? 그는, 철학자의 삶이 예사롭지 않다는 상식조차 뛰어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푸코를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그가 던진 의미 즉 현대적인 삶의 지평을 뒤흔들어놓은 철학자로서 말해져야 한다.


 


수천 명의 푸코


프랑스 푸아티에에서 부유한 외과의사 폴 푸코의 아들로 태어난 푸코는 1946년에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양성기관인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38명의 신입생 중 4등으로 입학했다. 푸코가 고등사범의 학생이었다는 것만으로 그의 비범성은 이미 드러난다. 그곳에서 그는 세계적인 석학들을 스승으로, 또 동료로 만났으며, 그곳의 지적 풍토 속에서 학문적 경계선을 넘나드는 치열한 학습을 하게 된다.


물론 어릴 때부터 푸코는 책읽기를 열심히 했고, 12살 때부터 두 동생들을 앞에 놓고 역사 강의를 한 일화가 있을 정도이다. 그런데도 고등사범 동기생들이 ‘악착같은 공부꾼’이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그는 앎에 대한 갈증으로 온종일 공부만 했으며, 관심의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주 예외적인 학생이었다.


그러나 푸코의 특이성은 관심의 다양성, 다양한 공부에 그치지 않고, 그 성격적 특성에서도 아주 복합적이고 다양한 인물이었다. 그의 스승 조르주 뒤메질은 수천 명의 푸꼬가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으며, 그 가면을 수시로 바꿨다”


푸코 스스로도 자신의 다양성에 대해서 꼭 같은 말을 했다. 즉 “내가 누구인지를 묻지 말고, 나에게 언제나 똑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기를 강요하지 말라”


이러한 성격적 특성은 그의 사상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요컨대 그의 사상은 하나의 이론적 체계가 아니다. 심지어는 그의 각각의 이론들은 상호 조화를 이루기보다는 모순과 갈등으로 점철된 담론 덩어리라고도 말해진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상적 특성에 입각하여 철학자를 분류하는 방식으로는 도무지 푸코를 분류하기 어렵다. 이것이 ‘비역사적 역사학자’, ‘반인문학적 인문주의자’, ‘반구조주의적 구조주의자’ 등 이러한 모순적인 개념을 푸코에게 붙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경계를 무너뜨리고자 했던 푸코


푸코가 일생에서 일관되게 했던 행위란 책 읽고, 도서관을 뒤지고, 글 쓰는 일이었다. 아마도 국립도서관은 푸코의 일생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일 터이고, (그가 고백했듯이) 스웨덴의 긴 밤을 글 쓰는 일로 지샜다!


그런데 공부와 관련되지 않은 영역에서는 그는 끊임없이 이탈하고, 경계를 넘나들었다. 실제적 삶에서도 푸코는 한 자리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파리에서 공부하던 젊은이는 불현듯 스웨덴, 폴란드, 독일을 넘나들면서 연구를 했고, 브라질, 모로코 등으로 옮겨 다녔다.


그가 수행했던 역할도 다양하기는 마찬가지이다. 1951년(25세) 가을부터 고등사범에서 한 강좌를 맡아 강의했을 때부터 뛰어난 말쏨씨, 명석함과 웅변으로 빛나는 인상적인 강의로 주목을 받았고, 1952년 가을부터 릴르 대학에서 심리학 강의를 할 때는 “역동성으로 가득찬 젊은 조교수”의 자유스러운 강의로 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런데 그는 철학 혹은 심리학 강의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생트-안느 병원의 심리검사 담당 연수생을 하기도 했고, 스웨덴 웁살라대학과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에서는 프랑스어 강사로, 또한 옵살라와 바르샤바의 프랑스문화원에서 각종 문화교류와 관련된 기획을 해내기도 했다. 그 어떤 역할이든 그는 탁월했다. 심지어 폴란드 시절 동성애 상대로 접근한 정부 첩자의 밀고로 강제출국을 당했을 때에도 그가 맡은 역할에 대한 평가에서는 최고의 평가를 남겼다. 1965년에는 브라질에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브라질 민주화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1968년 5월 혁명 당시 모로코에 있어 혁명에 동참하지 못함을 보상이라도 하듯, 1968년 후반에 삭발을 한 채 파리로 돌아온 이후에는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는 투사적 활동을 펼쳤다. 푸코는 감옥수감자, 이민노동자들의 인권문제, 스페인, 이란, 폴란드 등의 정치문제에 일일이 개입하는 등 전투적 지식인의 화신이 된 것이다. 1970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서명한 청원서들이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격렬한 사회운동가였던 것이다.


이렇듯 거주나 활동영역에서 경계를 넘나들듯, 그는 학문적 경계도 마음껏 넘나들었다. “프랑스에서는 누구든 철학자로서 마르크스주의자나 현상학자 혹은 구조주의자가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어떤 도그마에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그가 말한 그대로, 그는 전통적인 학문을 경계선을 넘나들며 그 개별학문의 경계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이러한 그의 학문적 특성은 철학은 말할 것도 없고 정신분석, 심리학, 임상의학, 역사, 문학 심지어는 미술과 음악의 영역까지 그가 펼친 지적 편력에서 드러난다.


푸코의 다양한 지적 편력은 분과화된 학문적 틀로서는 도무지 간파할 수 없는 앎의 지평을 열어젖혔다. 예컨대 당시까지 정신병을 개인적인 질병으로 보던 관점을 통렬하게 비판하면서, 정신병은 ‘인간이 역사적으로 소외되는 사회 안에서의 모순의 결과’로 보았다는 것, 그리하여 ‘환경과의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지 않고는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선언은 일상적 앎과 세련된 학문영역을 막론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탈출구를 제공했다. 요컨대 그가 던지는 중요한 메시지중의 하나는 모든 학문이 인간을 질곡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라면 진정한 심리학이 심리학주의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처럼 모든 학문은 그 학문을 지배하는 도그마를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병이 인간의 조건인 한에서 병은 건강의 심리적 진실이다”라는 말, 근대의학의 심장을 겨누는 획기적이고 도발적인 이 발언 역시 경계를 넘나드는 푸코가 아니라면 도무지 가능치 않은 傳言이다.


 


고독한 사람, 그 천재의 광기


푸코의 다양한 연구활동과 사회활동은 푸코의 여러 가면 중의 하나일 뿐이다. 푸코의 성장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푸코를 붙임성이 없는 사람, 잘 어울리지 않는 사람, 가끔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 자기처지를 불행하게 생각하는 사람, 정신적으로 허약한 사람이라고 기억한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고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독하다는 것은 뛰어난 철학자에게는 필수불가결하게 조건이라 할 수 있다. 고독한 시간을 견뎌내지 못하면 지식의 축적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푸코의 경우에는 고독의 정도나 양상이 일반적 예측을 불허하는 정도이다. 고등사범시절 그의 학우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언제나 고독 속에 웅크리고 있었으며, 그가 고독으로부터 나올 때는 단지 다른 사람들을 조롱하거나 비난할 때뿐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젊은 시절 내내 동료들로부터 배척당하는 원인이 되었고, 심지어 고등사범 수료후 티에르 재단에서 연구원 있을 때는 20여 명의 연구생 전원에게서 미움을 받아 연구원 계약 3년을 마치지 못하고 1년에 연구원생활을 끝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역사상 고독하지 않은 천재가 있었던가? 그의 유별난 행각은 다른 시각에서 보면 일반적인 생각을 뛰어넘는 천재성의 발로라고 할만하다. 천재성은 생각의 남다름에서만 아니라 행동의 남다름에서도 드러난다. 실제로 학창 시절 그는 가끔씩 불같이 화를 내고 공격성을 드러내었다. 더러는 자신의 천재성을 과시하면서 남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주변 사람들로 미움을 사는 것은 당연했고, 나아가 미치광이 취급도 받았다.


그가 고등사범 시절, 몇 번의 떠들썩한 자살을 기도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이기도 하다. 그는 교실 바닥에 누워 면도칼로 가슴을 그으려는 시도를 하다가 교수에게 발각되기도 했고, 태연하게 목을 맬 줄을 사러 마트에 가다 들키기도 했다. 동기생들이 회고하는 바로는 그는 “평생 광기에 아주 근접한 위치에서 살았다”


이러한 그의 정신적 상황을 감안하면, 그가 심리학, 정신분석학, 정신의학에 대한 강박적 관심을 가진 이유를 짐작하게 된다. 그는 정신치료기관을 찾아간 적도 있으나, 고등사범의 스승인 루이 알뛰세르의 조언대로 병원 치료를 거부했다.


우리는 푸코의 이러한 행각을 ‘천재의 광기’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생각이나 행동의 틀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그는 분명히 ‘광기’를 드러낸 사람이었고 천재였다. 그럼에도 그는 치열한 이성적 사유와 이론적 작업을 통해 자칫 광기로 떨어질 수도 있는 외줄 위에서 불안한 평형을 유지하였던 한 명의 철학자였다!!


푸코가 그의 박사논문인 『광기와 정신착란, 고전주의 시대의 광기의 역사』에서 “...‘또 다름’의 근원에서부터 이성과 광기를 서술해보아야겠다. 이성과 광기는 서로 교대하며 마치 하나가 다른 하나에게 죽어 있는 존재이듯이 일체의 교류가 없이 서로를 완전히 배제했었다”라는 말로써 서두를 시작한 것은 ‘광기를 드러내는 천재’와 ‘철학자’로서의 푸코를 여지 없이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오늘날 푸코의 이름에서 바로 떠오르는 책,『광기의 역사』는 푸코 그 자신의 내밀한 정신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서 자유롭게 횡단하는 문제의식 없이는 가능한 연구서가 아니다. 이 책에서 푸코는 “광기는 자연현상이 아니라 문명현상”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한다. 말하자면 한 특정한 사회 안에서 광기는 언제나 그 시대의 지배적인 담론과는 ‘다른 행동’ ‘다른 언어’인 것이다. 따라서 “광기를 묘사하고 광기를 박해하는 문화들의 역사 없이 광기의 역사도 없다” 는 것을 푸코는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광기의 역사』에서 보여준 그의 경계를 뛰어넘는 탁월한 발상과 이를 뒷받침하는 철저하고도 치열한 조사․연구는 이후 그의 모든 저서를 관통하는 공통점이다.


 


동성연애자라는 멍에


인간 푸코를 말할 때, 특히 그가 1984년 에이즈와 연관된 병으로 사망했을 때 사람들이 주목하는 이슈는 그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다. 실제로 그는 고등사범 수학시절, 밤에 몰래 빠져나가 동성연애자들의 바에 갔다오기도 했고, 더러는 수치심과 후회로 탈진 상태가 되어 앓아눕기도 했다고 한다. 1955년 스웨덴으로 떠나기 전, 푸코는 작곡가 장 바라케와의 2-3년간의 관계를 맺어왔다. 그가 스웨덴으로 떠난 이유에 대해서도 동성애자에 대해 훨씬 관용적일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고 말해지기도 한다. 스웨덴에서 푸코는 매일 바라케에게 편지를 썼는데, 현재 바라케 자료보관소에 있는 푸코의 편지는 연애문학의 극치라고 평해진다. “우리는 단 하나의 삶만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잃거나 망칠 권리가 없다”는 편지의 구절은 푸코가 얼마나 바라케를 사랑했으며, 자신의 사랑을 얼마나 확신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러나 푸코는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지 않았으며, 자신이 HIV보균자임을 숨겼다. 이 점에서 푸코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고, 심지어 그의 사상이 난도질당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가 동성연재자라는 것이 그의 학문적 가치를 깍아 내릴 수 있는가? 도무지 아니다. 그는 개인적 사회적 생활의 절망과 투쟁 속에서도 거기에 매몰됨이 없이 엄격하고도 치열하게 사유하며 지적 모험을 감행해 왔다! 푸코의 사유에서 말한다면, 왜 동성애자라는 것을 ‘커밍아웃’해야 하는가? 역으로 말하면, 우리는 자신이 이성애자임을 사회를 향해 고백하는가? 우리가 이성애자임을 고백하지 않아도 된다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라고 강요할 권리는 아무에게도 없는 것이 아닌가?


요컨대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것도 이것이다.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광기 등의 구분이 어떻게 권력이 생산하는 지배적인 담론에 의해 우리 자신의 앎이 되어 있는지를. 그래서 푸코는 다음과 같은 냉소적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당신의 이성에 대해, 당신의 과학적 개념에 대해, 당신의 지각 범주에 대해 그토록 확신할 수 있는가?”


 


규율권력에 저항하는 구체적 지식인


푸코(M. Foucault)는 전통적인 인식론이 추구해온 지식이란 순수한 지식, 즉 아무런 이데올로기적 연관도 갖지 않은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순수한 인식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이것은 지식의 역사를 통해 확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푸코는 그와 같은 순수하고 중립적인 지식이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권력의 모든 관계가 차단되어 있는 곳에서만 지식이 있을 수 있다거나 지식이 권력의 요구와 이해관계로부터 벗어나 초연해질 때에만 지식이 발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전통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다. 푸코에 따르면 모든 지식은 오히려 정치적 권력과의 관계에 기반을 둔다. 왜냐하면 지식은 권력을 떠날 수 없으며 권력은 지식을 생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지식과 권력의 이러한 특별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정신의학과 형법의 관계를 예로 든다. 이에 따르면 자유와 시민사회의 문명을 이룩한 서양의 근대 계몽주의적 지식체계는 근대적 시민사회의 국가권력을 형성했고, 이러한 권력에 의해 산출된 일종의 지식체계로서의 정신의학은 권력이 범죄자에 대해 가하는 일종의 형벌로서 기능한다. 따라서 정신과 의사는 의학적 역할로 위장한 권력의 기능자요, 그의 치료행위는 사회적 이단자에게 가하는 폭력행위의 합법화인 셈이다. 이처럼 지식과 권력은 밀접한 상관관계 속에서 서로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푸코가 말하는 지식이란 무엇이고, 권력이란 무엇인가? 푸코에게 있어서 ‘지식(savoir)’은 다양하게 분과화된 개별과학에서의 탐구내용(connaissance)과 구별된다. 오히려 지식은 개별과학적 탐구내용 전체를 포괄하면서도 그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로서 역할하는 지식 일반을 말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푸코는 지식을 ‘지적인 구성물’이라고 말한다. 이때 ‘구성물’이라는 것은 인간의 어떤 실천적인 작용이 개입된다는 것을 함축한다. 즉 지식은 어떤 대상들에 대해서 말을 하거나 어떤 행위를 가함으로써 구성된다는 것이다.


지식이 구성되는 것이라면 그 구성요소들이 있을 것이다. 푸코는 지식의 첫번째 구성요소를 실재하는 사실, 즉 ‘사물’이라고 본다. 예컨대 생산이나 분배는 경제학의 사물이며, 세포와 유전자는 생물학의 사물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물들만으로는 지식이 이루어질 수 없다. 사물은 지식의 내용일 뿐이다. 이 내용은 표현되지 않으면 안되는데, 이것을 표현하는 것은 말, 즉 담화이다. 에컨대 생산과 분배라는 사물을 경제학적 담화로 구성한 것이 경제학 지식이며, 세포와 유전자라는 사물을 생물학적 담화로 구성한 것이 생물학 지식이다.


일반적으로 지식의 두가지 구성요소 중에서 사물이 더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푸코는 말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물은 항상 그대로이지만 담화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항상 변화되어 왔기 때문이다. 푸코는 구체적으로 ‘광기’를 예로 든다. 유럽, 특히 프랑스에 있어서 ‘광기(folie)’라는 말은 시대마다 다르게 정의되었다. 중세기에는 광인(fous)을 한편으로는 타락의 결과로서 그 영혼이 짐승의 포로로 사로잡혀 있는 사람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보통사람에게는 없는 신비적이고 밀교적인 마력을 가진 사람으로 본다. 따라서 이들은 광인들을 성밖의 격리수용소에 광인들을 격리시키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광인은 두려움과 호기심이라는 두가지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이것은 아직도 광기(몰이성)가 이성과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르네상스시대에도 마찬가지다. 이 시대에는 광인을 배에 태워서 외딴 섬으로 유배를 보낸다. 이 배의 상징은 반은 현실적이고 반은 상상적인 지점을 말한다. 이 시대의 연극들에서 나타나듯이 광인들은 익살스럽지만 진실을 예고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 시대에도 광기는 이성을 넘어서 있는 어떤 의미영역을 지시한다. 그러나 17-18세기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매우 달라진다. 즉 광기는 ‘기이함’이 아니라 ‘정신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계몽주의적 합리성에 기인한다. 합리성은 이성을 건강함으로 몰이성을 병적인 것으로 엄격하게 구분한다. 그리고 몰이성은 도덕적으로 불선한 것이다. 이 시대에 탄생한 일반병원(l'Hôpital générale)이 의학상의 치료를 목적으로 한 의료기관이 아니라 몰이성적인 사람들을 이성적인 사람으로 교정하는 행정기관이었다는 것은 이 시대의 부르주아적인 사회질서상을 잘 대변해 준다. 19-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실제적인 의료기관으로서의 정신병원이 나타난다. 이 시대에는 정신치료요법들이 연구되기 시작하고 병원에 의료종사자들(의사, 간호사)이 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정신병원은 광인들에 대해 이전 보다도 더 교묘한 정신적 고문을 감행한다. 즉 광인들이 사회적 무질서와 혼란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도록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몰이성에 대한 이성의 우월성을 관철시키는 부르주아적 정신의 극단적인 형태인 것이다. 이러한 점은 지식의 형성에 있어서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며, 이 말의 변화는 항상 권력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 푸코에게 있어서 권력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어떤 실체로서의 권력이 아니라 사회조직을 구성하는 유기체적 관계의 전체이다. 따라서 권력은 지배집단이 획득하여 소유할 수 있는 어떤 대상적 실체가 아니라 지배집단이 의도하는 전략적 입장의 총체적인 효과인 것이다. 즉 지배집단은 강제적인 법률조항으로써 피지배집단을 억압하고 통제하여 권력의 직접적인 효과를 노리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전략들을 통해서 드러나는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략들의 효과는 결코 전면에 드러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그들이 행위하는 것 그 자체가 무엇을 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와는 달리 권력은 또한 생산적이고 적극적인 힘이기도 하다. 권력은 사물을 만들어내고 쾌락을 가져오며 지식을 생산하고 담화는 실천을 가능케 하는 효율적인 생산성을 갖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 본 지식의 실천적인 계기와 권력의 생산적인 계기는 위에서 언급했던 지식과 권력의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한다. 푸코는 이러한 지식과 권력의 상호함축적인 관계를 추구한다. 그러나 지식이 일종의 억압적 힘으로서 행사되는 규율적 권력의 도구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예컨대 판옵티크(panoptique)라고 불리우는 원형감옥건물과 같은 감시적 감찰의 수단으로서, 처벌과 보상을 교묘하게 운용하는 규범적 판단을 만들어내는 도구로서, 계산과 측정에 의해 개인의 행동을 객관화하고 자료화하는 검사체계로서 규율적 권력에 봉사하게 되는 경우가 그것이다.


푸코는 이러한 위험을 투시하는 것, 즉 규율적 권력이 자유자재로 행사되고 있는 것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이라고 말한다. 즉 지식인이란 과거에는 스스로 진리의 담지자나 보편적 이념의 수호자로 자처하였으나, 이제는 가정, 작업장, 실험실 등 스스로가 처해있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규율적 권력의 침투를 해체하고 상호 함축적인 지식-권력관계를 투시하는 사람이다. 푸코는 전자를 보편적이고 통시적인 전인류적 목표를 위해 투쟁하는 ‘보편적 지식인’이라고 부르고, 후자를 삶의 일상적인 현상에서 구체적인 목표를 위해서 투쟁하는 ‘구체적 지식인’이라고 부른다. 푸코가 근대적인 인식비판을 통해 나아가고자 했던 궁

목 록